본 단독주택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수원화성의 안쪽에 위치한다. 1795년 정조의 현륭원 행차와 연회 등 일련의 행사를 그린 화성능행도를 통해 본 주택의 대지가 조선시대부터 성곽 내 주거지였음을 추측할 수 있다. 가까이는 서측에 직접 마주한 동일포루와 성벽, 멀리는 팔달산의 풍경과 연결되는 경관상 그리고 삼거리 모퉁이에 위치함으로써 자연스럽게 주변의 이정표가 되는 맥락은 본 건물의 공간과 형태의 논리를 만들어 주었다.
어디에나 있는 요소, 어디에도 없는 전체
2016년 베니스 건축 비엔날레의 한국관 전시인 „용적률 게임“이 다룬 것처럼, 한국의 도심 내 주택이나 근린생활 시설의 형태는 많은 경우 정북사선으로 대표되는 법적 규제와 용적률의 최대 확보에 큰 영향을 받는다. 본 주택의 건축주는 살아가는 데 필요한 각 공간이 자체로 충분하다면 건축 가능한 면적을 모두 채우지 않아도 좋다는 생각이 있었기에 이 게임의 룰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울 수 있었다. 대신 주택의 대지는 2020년 수립된 수원화성 지구단위 계획에서 지정된 역사문화미관지구에 속해 있었으며, 특히 수원화성과 인접한 땅으로, 지어지는 건물의 지붕 방향과 경사, 재료 그리고 색채 등에 있어 상세한 조례들이 지정되어 있었다. 우리는 아직 완벽하진 않더라도 이러한 규정들이 만들어내는 장소의 정체성을 가진 도시경관의 지향점에 공감했으며 본 주택이 지역의 조례에 충실하면서도 더불어 고유한 성격을 가진 동네의 레퍼런스 건물의 역할을 하기를 바랬다.
세 면이 만들어내는 두 얼굴
우리는 대지의 남측에서 모퉁이를 향해 다가오는 사람들이 바라보는 건물의 세 면과 서측의 성곽길을 따라 걷다가 마주하는 두 면이 각각 만들어내는 서로 다른 표정이 주(main)-부(sub)로 나뉘기 보다는 동등한 위상을 가진 정면 파사드의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건물에 어떤 표정을 부여하는 데 있어 반드시 사람의 얼굴처럼 보이거나 좌우대칭일 필요는 없다. 대신 두 얼굴은 비트루비우스가 건축십서에서 언급했던 "건물의 전체의 형태와는 별도로 개별부의 상호관계에서 기인하는 조화" 로서 대칭의 성격을 가진 건축적 파사드로 발전되었다.
낡아가며 완성되는
건물의 외장은 수원화성을 구성하는 주요 재료의 상호 관계와 구축원리를 이해하고 이를 재구성하는 과정을 통해 성곽과 대화(Dialogue)의 지점들을 늘려 나간다. 재료의 수직적 구성에 있어 건물은 크게 사암계열의 무기질 천연 모르타르 만으로 이루어진 기단부와 백고, 청고 벽돌을 약 3:1의 비율로 쌓은 후 그 위에 조적의 질감이 남아있도록 모르타르로 얇게 덮어 두터운 질감을 드러내는 몸체 그리고 짙은 회색의 기와로 덮인 지붕부로 나뉜다. 기단과 몸체 사이에는 출입구, 환기창 등의 오프닝이 삽입되는 가운데 두 가지 다른 높이의 경계선이 형성되는데 이는 성곽 하단부에서 다듬어진 돌들이 맞물려 쌓인 모습을 연상케 한다. 대지의 바닥 면과 출입구 계단은 화강암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모서리가 모두 닫힌 파사드 가운데 위치한 조망을 위한 정사각형의 창문은 돌출된 초고강도 콘크리트 프레임이 감싸고 있다. 성벽 안쪽에 인접해서 밖을 관찰하거나 공격하기에는 충분한 크기면서도, 밖에서 안을 향하는 시야에는 충분히 보호될 수 있는 성격을 가진 근처 성곽에 뚫린 포구멍은 조망창의 규모, 형태, 깊이를 다듬는 과정에 있어 좋은 참고의 지점이 되었다.
다 지은 순간에 가장 빛나기 보다는 수원화성의 성곽처럼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연스럽게 낡음과 때를 입고, 주변을 오가는 이들의 기억 속 풍경에 뿌리내린 건물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공간구조
재택근무 등 평소 집에 머무는 시간이 많이 긴 부부 건축주를 위해 주택은 따로 또 함께 일하고 머물기에 좋은 공간구성이 필요했다. 동시에 집 안에서 다양하고 아름다운 경관을 조망할 수 있으면서도 삼거리의 코너에 위치해 많은 부분 노출된 주택건물의 프라이버시를 일정이상 보장할 수 있어야 했다. 이러한 양가적 속성을 가진 조건들을 동시에 충족할 수 있는 공간구조를 발전시키는 데 있어 아돌프 로스(Adolf Loos)의 라움플란(Raumplan)이 제시했던 방의 구성과 상호작용에 대한 관점은 하나의 단서가 되었다. 화장실, 창고 등을 제외한 머무는 실들은 주된 쓰임을 고려해 각자의 바닥레벨과 공간 높이를 가진다. 이러한 실들은 건축주와 소통을 통해 각자의 목적을 충족할 수 있는 규모와 형태를 가지며 근, 원경의 풍경을 담는 창과 함께 각각 고유한 분위기를 드러낸다. 모든 거실들은 동물의 척추와 같이 방들을 유기적으로 엮어주는 계단을 통해 내적 시퀀스를 가진다. 계단의 배치는 내부구성 전체의 시작점이었다. 주택의 모든 계단들은 대지 동쪽의 도로와 두 성곽 길 세 레벨을 연결하는 노천계단들과 동일한 방향을 가진다. 이를 통해 내부 공간들 사이에서 뿐 아니라 밖의 장소들 과도 긴밀한 대화의 가능성이 열리길 기대한다. 더불어 단 너비 30 cm, 높이 16 cm의 편안한 경사를 가진 계단은 오르내릴 때 이동행위에만 집중하지 않고 주변을 둘러볼 수 있는 여유를 제공한다.
본 주택은 저층부 공간의 프라이버시를 위해 높은 바닥레벨을 가지는 호흐파테레(Hochparterre) 유형으로 계획되었다. 출입구 계단을 올라 집 안으로 들어서게 되면 옛 가옥의 평상처럼 50cm 정도 높게 형성된 빈터가르텐(Wintergarten, 추운 날씨에도 화분 등을 높을 수 있도록 큰 유리창이 달린 실내정원)과 주방공간이 맞이한다. 사시사철 식물들이 잘 자랄 수 있도록 햇살이 넉넉히 들어오는 이곳의 창에는 다른 조망 창의 외부에 설치된 콘크리트 프레임을 안쪽으로 둘러치는 가운데 바깥 가로공간에 대한 파사드의 반응을 안으로 역전시키는 유희적 제스처를 보여준다.
작업실을 지나 비정형의 거실로 올라가면 한 벽에 하나씩 자리잡은 창문들이 화성 일대의 근경과 원경을 내부로 끌어들이는 장면을 마주한다. 세 방향의 창에서 흘러 들어오는 햇빛을 통해 거실은 구석까지 하루 종일 균일한 온기와 밝기를 머금는다. 거실 공간의 한 코너에는 커피와 차를 위한 간이 부엌이 자리잡고 있다.
세 단을 더 올라가면 서장대와 대승원 미륵불상을 품은 팔달산 풍경이 펼쳐지는 침실에 다다른다.
촉각적 재료
내부공간의 주 재료는 백색도장과 두 가지 목재로 마감되었다. 가구와 복도, 계단공간 바깥쪽 벽들은 밝은 계열의 떡갈나무로, 실내 문, 경사지붕 천정 그리고 계단영역 중심에 자리잡은 볼륨이 드러나는 벽은 짙은 호두나무 재질로 만들어진 가운데 공간은 따스한 활발함과 차분한 분위기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간다. 주요 거실들의 바닥재는 떡갈나무 재질의 원목마루로 마감되었으며, 주방과 세탁실-창고만은 쓰임을 고려해 리놀륨이 적용되었다. 조망 창들은 내부에서 창의 액자효과를 한층 강조하고 장기간 쓰임의 흔적을 자연스레 담기 위해 호두나무 원목패널로 둘러쳤다.